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문단 편집) === 실전에서 === 1942년 11월 14일 과달카날 해전 2부 야간, 사우스다코타는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 및 구축함 4척과 함께 과달카날섬 160km 부근에서 일본의 곤도 노부다케 제독이 이끄는 함대(전함 키리시마,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1척)와 조우했다. 사우스다코타는 이 야간해전에서 전기 회로 문제로 인해 말썽을 겪었고 5,200m~9,000m 이내의 '''지근거리'''에서 일본 해군의 집중포화를 받아 상부구조물에 달린 레이더와 사격통제장치, 통신 안테나들이 부서지고 망가지는 등 큰 피해를 봐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다행히 구조나 부력 면에서는 치명상을 받지 않은 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당시의 일본군의 상태는 아래와 같았다. * 선제발견 - 사우스다코타의 레이더는 전기 회로의 고장 재발로 인해 작동하지 않았던 시점에 일본군은 탐조등으로 비추어 사우스다코타를 발견했다. * 지근거리사격 - 5,200m ~ 9,000m 이내라는 초근접거리[* '''"5km가 초 근접거리라니?"'''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전함대 전함전에선 '''망원경이 아닌 맨눈으로 상대함이 보이기만 한다면 초근접 ~ 중거리 전투이다.''' 함의 사이즈와 함포의 구경등을 사람과 소총에 비유한다면 5km거리의 함대함전은 '''[[축구장]] 안에서 M16 소총을 들고 서로 자동으로 놓고 쏘고 있는 것이다.''']에서 일제사격을 실시했다. 특히 키리시마는 가장 가까운 거리인 5,200m에서 탐조등까지 비추면서 사격을 했다. 여기에 더해서 키리시마는 개량되었다는 1식 철갑탄을 사용했으며, 키리시마의 14인치 45구경 주포의 경우, 잘 쳐주어야 동급이고, 보통은 약간 아래라고 평가받는 미국의 구식 14인치 45구경 Mark 1 주포의 위력이 5,490m에서 측면장갑 437mm를 관통 가능하다는 것을 고려할 경우, 충분히 스펙상으로는 사우스다코타의 측면장갑을 관통 가능했다. [[http://www.navweaps.com/Weapons/WNUS_14-45_mk1.htm|미국 구식 14인치 주포]] [[http://www.navweaps.com/Weapons/WNJAP_14-45_t41.htm|일본 14인치 주포]] * 아군의 지원군은 있으나 적의 지원군은 없음 - 일본군은 [[중순양함]]과 [[경순양함]], [[구축함]]의 지원세력이 있었으며, 구축함 1척의 손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상없이 살아남아서 사우스다코타에 대한 집중포격전시도 같이 참여한데 반해, 미국의 지원세력은 구축함 4척뿐. 그나마 포격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미 다 격침되거나 대파돼서 표류중인 상태였다. 게다가 동료 전함인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전함)|워싱턴]]은 레이더 장착위치 문제로 인해 키리시마를 레이더로 포착 했음에도 레이더 상에서 사라진 사우스다코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격을 늦추고 있었다. * 철갑탄 준비 - 과달카날 해전 1부때 목숨을 걸고 돌격한 미국 순양함 함대와 사투를 벌린 경험을 살려, 순양함 이하는 다 '''[[철갑탄]]'''을 미리 장전한 상태고, 전함인 기리시마는 총 [[삼식탄]] 68발, 영식탄 22발, 1식 철갑탄 27발을 발사했다(키리시마의 전투상보). 결과적으로 일본 함대가 사우스다코타에게 이론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포탄은 이 1식철갑탄 27발 뿐이었다.[* 왜 전함은 고폭탄이고 순양함은 철갑탄을 장전했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의 함대사령관인 곤도 제독이 사우스타코타와 워싱턴을 위시한 미 함대를 순양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우스타코타급을 중순양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휘하 순양함과 구축함에게 미 함대를 상대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함은 과달카날에 대한 함포사격을 목적으로 했었기 때문에 철갑탄이 아닌 고폭탄을 장전한 것이다.] * 명중 포탄 - 착탄 흔적을 조사한 결과 최소한 26발의 포탄에 맞았으며, 구경별로는 14인치 1발, 8인치 18발, 6인치 6발, 5인치 1발이었고, 거의 모든 포탄이 철갑탄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14인치 1발이 전부였고 사우스다코다급은 애초에 16인치 대응장갑이다. * 포탄 집중지역 - 26발중 16발이 상부구조물, 특히 마스트 부위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통신 안테나, 내부 통신용 회로, 사격통제장치, 레이더 등 전자장비에 피해가 집중했다. * 장갑부 피해 - 6인치 2발, 8인치 3발, 14인치 1발이 장갑부에 명중했고, 신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였으나 장갑이 관통된 부위가 없다. * 수중탄 피해 - 8인치 1발이 수중탄으로 명중했고, 신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나 폭발흔적만 남기고 관통되지 않았다. * 포탑 피해 - 14인치 1발이 3번 주포탑 바벳에 명중했고, 신관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나, 깊이 1.5인치, 직경 15인치 정도의 폭발 흔적과 수직으로 난 균열이 몇 군데 발생했다. * 침수 피해 - 수선 하부의 비장갑구획에 명중한 몇몇 포탄으로 인해 0.75도의 경사가 발생했으나 이 정도의 경사는 약간의 트림 조정으로 금방 해결했다. 사우스다코타급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던 포탄은 3번 주포탑 바벳에 명중한 14인치 1발이지만 사우스다코타급의 바벳측면장갑이 440mm여서 관통은 하지 못해 3번 포탑 내부에 확실한 타격까지는 줄 수 없어 완전파괴가 아닌 포격불능의 피해만 주었다. 일본군의 철갑탄은 정작 명중해도 작렬하지 않거나 혹은 신관 작동이 너무 늦어서 상부구조물을 뚫고 지나간 뒤에 작렬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이 수중탄 효과를 중시하여 신관 지연시간을 지나치게 길게 잡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일단 포탄이 수면에 격돌하여 신관이 작동한 후에 지나치게 일찍 작렬하면 피해가 미미하므로 수면 돌입 이후 함체에 닿을 때까지의 시간을 고려하여 지연 시간을 길게 잡은 것이다. 그러나 포탄이 반대로 수선 상부에 명중할 때는 길게 잡은 지연시간이 오히려 독이 되었는데, 관통 도중에 신관이 망가져서 불발된다거나 혹은 얇은 격벽을 다 뚫고 지나간 후에야 뒤늦게 작렬하는 식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해전 후 미국 해군에서는 사우스다코타의 피탄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고 마지막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수많은 피탄에도 불구하고 사우스다코타는 미미한 피해만을 입었다. 구조, 부력, 안정성 중 어느 것도 측정될 정도로 손상되지 않았다."|| [[http://www.researcheratlarge.com/Ships/BB57/1942DamageReport/GuadalcanalDamageRpt.html|피해 보고서 원문.]] 다만 전후 미국의 연구가 Robert Lundgren은 미함선국의 피해 보고서에 의문을 표하며 다음과 같은 논문을 제시 했다. [[http://www.navweaps.com/index_lundgren/South_Dakota_Damage_Analysis.htm]] 그 외에 운용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기도 했었다. 동형함들도 만만치 않아서 인디애나는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인 워싱턴에 부딪쳐서 하마터면 침몰할 뻔 했다. 아래는 그 이런저런 사고 이야기를 서술해놓은 것이다. * 1942년 8월 16일에 취역후 최종 재조정을 받고 필라델피아를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거쳐 9월 4일 통가의 누쿠알로파에 도착했다. 이틀 후 라하이 수역을 지나던 사우스다코타는 해도에 표시되지 않은 암초와 충돌해 파손을 입어 9월 12일에 진주만으로 가서 수리를 받았다. * 1942년 10월 26일 [[산타크루즈 해전]] 도중 40대 정도의 항공기가 사우스다코타와 엔터프라이즈에 공격을 가해 사우스다코타는 1번 주포탑 상부에 250kg의 폭탄을 맞았고 적기는 26기를 격추했다고 보고했지만, 격추중복보고가 있을 가능성도 있어 실제 격추 숫자는 더 적을 수도 있다. * 1942년 10월 30일 새벽 4시 14분, 사우스다코타는 [[구축함]] 마한(Mahan)과 충돌사고를 일으켰는데 마한은 선수가 구부러지면서 대파되었다. 이에 두 함정은 누메아로 귀환해 사우스다코타는 공작함 [[베스탈]]로부터 응급수리를 받았다. * 1942년 11월 14일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 2부에서 앞서 언급된 대로 전기 회로 문제로[* 적 구축함과 교전 중 127mm 포탄 1발이 상부구조물에 명중했는데 보수작업을 하던 고참 기술병이 안전수칙을 어겨 전기계통이 한꺼번에 나갔고 전기가 돌아왔다가 다시 떨어지는 문제를 꺾었다.] 인해 말썽을 겪었고, 일본 해군에게 집중사격을 받아 피해를 보았다. 해전 종료 후 사우스다코타는 누메아에서 응급수리를 받은 후 12월 18일에 뉴욕에서 대수리에 들어가 1943년 2월 25일에 다시 복귀했다. * 1945년 5월 6일, 보급함 랑겔에서 보급중이던 16인치 주포탄약고의 폭발사고로 인해 사우스다코타도 화재가 발생하여 탄약고 4곳이 폭발하고 2번 양용포가 불타 3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입었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 해군이 승리한 [[필리핀 해 해전]]에서 '''유일하게 직격탄을 맞은 미국 해군 함정'''이기도 하다. 물론 저 정도의 사고는 2차 대전 당시에는 있을 수 있는 사고였다. 전후에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뻘밭에 걸치거나 구축함과 들이받는 사고는 있었고, 1989년에 1번함 아이오와가 주포탑이 폭발한 사고가 있었다. 미주리도 한국전쟁 중 함장의 심장병으로 인해 본국에 돌아가야 했던 전력이 있고 전투 중 전함이 적탄에 피격되는 일은 그다지 신기해야 할 일도 아니다. 즉, 사우스 다코타만 저런 사고가 터진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우스다코타의 첫 함장이던 토마스 개치(Thomas Leigh Gatch) 대령은 함 승조원들의 위생 상태 등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승조원들은 세탁이나 샤워 등을 잘 안 했고, 배의 청결상태도 개판이었다. 그러나 개치 대령이 단순히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구축함 유키카제|그딴 거보다 우린 실전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으로 그런 것이었고, 이러한 혜안으로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사우스다코타는 하루에만 적기 26기를 격추했으며, 이는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격추당한 일본군 항공기의 23.92%나 되는 수치로 그의 생각은 옳았음이 아주 잘 드러났다. 사우스다코타와 함께 16문의 40mm 보포스를 장착했던 엔터프라이즈는 7기를 격추했다. 더 재미있는 점은, 보통 이런 성향을 가진 지휘관이라면 야전 경험이 많은 베테랑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토마스 개치 대령은 이 사우스다코타 함장 자리가 그의 군 인생 최초의 함장 자리였고 그 전에는 해군 법원 재직과 사관학교의 포술 이론 강의 등 행정 및 참모 위주의 경험을 쌓았던 '''책상물림'''이었다. 개치 대령은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다른 야전 경험이 많은 제독들에게 질시를 조금 당했다고. 그도 그럴게 사우스다코타와 같은 신형 함선의 초대 함장 자리라면 당연히 '끗발'이 세기 마련이고 해당 인사도 그에 맞는 경력을 가진 인사가 배치되는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런 '책상물림'이, 그것도 이전까지는 아예 함장 경험이 없던 사람이 함장 자리를 맡았으니 질시를 당했던 건 당연했다. 그래도 토마스 개치 대령은 함장 자리를 포커쳐서 따낸 건 아닌지 이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함선을 잘 지휘했고, 이후 과달카날 해전 때 사우스다코타가 정전으로 장님 신세가 된 상황에서도 잘 버텨서 함선과 승조원들을 구하였다. 다만 이 산타크루즈 해전 때 사우스다코타의 함교가 공습을 받으면서 개치 대령 본인도 목에 부상을 입고 약 1달간 치료를 받은 뒤 퇴원하였고, [[과달카날 해전]] 이후엔 부상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함선 근무가 곤란해서 1943년 2월 부터는 함선 근무를 종료하고 법무 분야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며 중장까지 진급하였다. 즉 토마스 개치에겐 이 사우스다코타 함장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함선 근무 경력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